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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 31

소설-우리는 2011/02/15 13:43 Posted by 피안™
 "하진아 넌 무슨 음식 좋아해?"
 "음... 된장찌개?"
 "뭐야? 그렇게 평범한 걸?"
 "누님. 된장찌개가 다른 사람들에겐 평범한 지 몰라도 저에겐 절대 평범한 음식이 아니거든요."
 "왜?"
 "좀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죠. 우리 어머니가... 음... 이렇게 집안의 치부를 밝히게 되나니.. 큭. 어머니의 요리솜씨가 좀... 그래서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어요. 어느날 친구 녀석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 어머니가 된장찌개를 끓여주시더라구요. 그 맛이란... 흠.. 그 이후로 된장찌개를 좋아하게 됐죠. 근데 식당에서 끓이는 건 달기만 하고 맛이 없고, 어머니한테 끓여달라고 하기엔.. 생명의 위협이.. 그래서 좋아하는 음식이자 특별한 음식이 된거라구요."
 "흠... 그래? 그거 잘 됐네. 가자."
 "어딜요?"
 "된장찌개 해줄 게."
 "네?"

 주섬주섬 쓰레기를 챙겨 일어서는 서인의 뒤를 하진은 급히 따랐다. 그러면서 머리 속으로 방금 들은 말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맞춰보았다. 그리고 곧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오오. 설마 누님 직접 된장찌개를 해 주신다는 거에요?
 "왜 싫어? 의심스러워? 그냥 술집으로 갈까?"
 "아! 아니요. 안 싫어요. 절대!"
 "그럼 따라와."
 "네."

 조금 걷자 곧 익숙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몇 번 왔었던 서인의 집 앞이었다. 서인이 곧 열쇠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자 약간 주춤한 걸음으로 하진이 따라 들어갔다. 하진의 가슴은 이미 쿵광거림으로 정신 없는 상태였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들어와. 너 데리고 올거라 생각 안해서 안 치웠으니깐."
 "무슨 기대요?"
 "여자 방이라고 핑크색으로 장식되어 있을 거라던지 레이스가 달려있을거라든지 인형이 가득할 거라든지 그런 기대 말이야."
 "우~. 누님한테 그런 거 기대 안해요."
 "뭐야?"
 
 홱하고 돌아보는 서인의 매서운 눈초리에 움찔한 하진은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했다. 서인은 방으로 들어서며 대충 떨어져 있는 이부자리를 대강 정돈 하고 바닥에 널부러진 옷가지들을 걸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방석을 하나 꺼내어 하진에게 권했다. 

 "일단 여기 앉아 있어. 심심하면 티비 보고."
 "네."

 하진의 눈은 이미 방 여기저기로 향하고 있었다. 서인은 좀 깔끔하게 치워둔 다음에 부를 껄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확인하니 대강 찌개를 끓일만한 재료들이 보였다. 뚝배기에 물을 올리며 서인은 왠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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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30

소설-우리는 2010/09/19 15:03 Posted by 피안™
 

 "기사님 저기 골목 돌아서 바로요. 내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혼자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
 "네. 괜찮아요."
 "남자친구 때문에 아가씨가 고생이 많네요."
 "네? 아... 네..."

 남자친구라는 택시기사의 말에 화들짝 놀란 연희는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성혁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이 절 그렇게 봐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곧 택시에서 내린 연희는 성혁을 부축하며 그의 집으로 갔다. 내리면서 깨운 탓인지 귀소본능인건지 성혁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집쪽으로 발을 내딛기는 했다. 하지만 인사불성이 된 남자를 끌고가는 것은 생각보다 꽤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연희는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손으로 닦으며 성혁에게 말했다.

 "오빠 다 왔어요. 정신 좀 차려봐요. 방 열쇠 어딨어요?"
 "으음..."

 성혁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손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잠시 궁리하던 연희는 할 수 없이 성혁을 대문 옆 벽에 기대어 놓고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혁의 두 팔이 그녀를 감싸안았다. 

 "서인아..."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란 연희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그렇게 술에 취해서도 찾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연희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고였다. 

 "서인아... 가지마."

 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가슴을 찢어 놓았지만 그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연희는 잠시 그대로 있고 싶다는 충동에 빠졌지만 곧 성혁을 이렇게 오래 밖에 세워둘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그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뒤 그의 착각을 이용해 일단 그를 방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성혁아. 여기 밖이야.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응. 알았어."

 성혁은 그녀를 정말 서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연희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연희는 방문을 열고 침대 위에 그를 눕혔다. 그리고 그의 가방을 방 한쪽 구석에 내려 놓은 뒤 잠시 의자에 걸터 앉았다.

 "휴..."

 전신이 노곤해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자는 건 둘째치고 그를 끌고 오느라 땀으로 범벅이 되어 몸이 너무 끈적거렸다. 그의 방에서 씻을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역시 안된다고 생각한 연희는 누워있는 성혁 옆에 잠시 앉았다. 그가 깰까봐 눈으로만 살짝 인사하고 가방을 찾아 방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인아... 가는거야?"

 문을 열려던 연희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하고 있었다. 잠꼬대 이려니 싶은 생각에 다시 나가려던 연희의 뒤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가지말라니까. 넌 그 녀석이 그렇게 좋니? 나는 안되겠니? 10년 동안 내가 들인 공으로는 부족하니? 그럼 10년 더 기다릴게. 그래도 안되?"

 연희는 너무나 또렷한 그의 목소리에 그가 지금 깨어있나 싶어 그의 곁으로 다시 다가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눈을 감은 채 약간 몽롱한 표정이었다. 연희는 다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정연이 일은 사과할게. 미안해. 그날 정연이 집에서 날 본 거... 나 그 때 정말 절박했어. 나만 바라봐주는 여자를 나도 좋아해보자 라고 생각했어. 근데 네가 찾아왔잖아. 그래서 난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어. 그저 옆에만 있으려고도 했어. 근데... 다른 남자라니.. 그건... 견디기가 힘들더라. 변한 네 눈빛이 나를 미치게 했어. 그 눈빛... 나는 10년을 기다려도 받아본 적 없는데 그 녀석은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 너 진짜 나한테 너무한 거야. 정말 너무한거라구."

 그의 쏟아지는 독백에 연희의 얼굴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신이 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되나 싶은 생각에 뿌리치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의 손은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고 있었다. 

 "그래. 억지라는 거 알아. 그리고 마음이 내 맘대로 되는게 아니란 것도 알아. 네 마음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네 마음이 변하지 않았듯이 내 마음도 쉽게 변하진 않을거야. 미안하다. 내 마음은 아직 널 놓을 수가 없어."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연희는 그것을 느꼈지만 한동안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놓을 수가 없다는 그 말이 너무나도 깊게 가슴에 박혔다. 잠시 후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이번엔 성혁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 앞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연희는 곧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누워있던 성혁의 입에서 나직히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연희야."

 
--

 [모시러 가기 귀찮아서 공원으로 바로 왔다. 끝나면 장평공원 중앙에 있는 정자로 와]

 서인의 문자를 받은 하진은 순간 당황했다. 자신은 이 동네에 사는게 아니라서 지리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인터넷으로 지도 검색을 해보고는 대략 위치를 파악한 하진은 상훈을 애타게 기다렸다. 마침 상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아 그래? 나 제시간에 온거 아니였어?"

 손목 시계를 들여다 보고는 상훈이 정시에 온 게 맞다고 외치려는데 그 새 바람같이 그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하진이 보였다. 상훈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저녀석 왜 저래.. 무슨일 있나?"

 
 공원 정문을 슬며시 내려다 본 서인은 뛰어 들어오는 하진의 모습을 발견했다. 서인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침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서인은 가져온 봉지에서 주섬 주섬 무언가를 꺼내 옆에 늘어놓았다. 마지막 것을 꺼내는 데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진이 그녀의 곁에 도착했다.

 "아 힘들어. 누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 이 동네 사람도 아닌데 여기 찾느라고 엄청 해맸잖아요."
 "잘 찾아온 거 다 알아. 그리고 이 동네 공원은 여기 하나밖에 없거든? 왔으면 앉아."
 "헉헉. 뭐 시원한 것 좀 없어요?"
 "자 여기."

 시원한 맥주캔을 건네는 서인의 모습에 하진은 빙그레 웃음지었다. 서인은 그것을 건네며 하늘에 손짓을 했다. 하진은 그 손짓에 따라 눈을 돌렸다. 맞은 편 산위에는 해가 반쯤 몸을 가리고 있었다. 산 봉우리 주변 하늘은 보기만 해도 따뜻해 보이는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진은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잠시 잊은 채 하늘을 감상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짝 본 서인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로써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노을을 보여준 두 번째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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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9

소설-우리는 2010/09/17 00:07 Posted by 피안™

 그녀는 어떤 남자와 둘이 있었다. 그 남자는 상의를 입지 않은 채 그녀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등만 보아도 그녀의 가슴이 살짝 아려왔다. 그녀의 손이 그의 등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덜컹]

 문이 열렸다. 열린 틈으로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 사람을 본 그녀는 입이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뿐만 아니라 몸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을 연 그 사람은 안을 슬쩍 둘러보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닫고 나가려 했다. 그러자 그녀에겐 뒷모습을 보이던 그 남자가 그 사람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강서인!"

 [부우우웅-]

 정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성혁과의 통화를 끝내고 생각에 잠긴다는 게 어느새 침대에서 잠이 들어 있었던 듯 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방금 꾼 꿈을 떠올렸다. 좀 더 꿈에 대해 생각하려는데 문득 어떤 소리를 듣고 자신이 일어났다는 게 떠올랐다. 화장대 위에 놓인 휴대전화의 액정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것을 들고 확인했다.

 [정연씨~ 좋은 밤 되세요. 복잡한 것들은 잠시 내려 놓으시고 푹 쉬세요.]

 정연은 문자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현식과 데이트를 했다는 기억이 났다. 성혁과 서인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해서 정작 오늘 만난 현식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시간을 확인한 정연은 전화를 들고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며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전화를 그냥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뭔가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뭐라고 써야 할지 너무 난감했다. 정연은 나직한 한숨을 토하며 다시 몸을 눕혔다.  


--

 편의점 근처에 도착한 하진은 슬쩍 편의점 안을 쳐다보았다. 손님은 평소처럼 많은 상태였고 서인은 계산해주랴 말 상대 해주랴 정신이 없어보였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안심한 하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서인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왔으면 빨리 들어올 것이지 망은 왜 봐?"
 "헉. 누님 보셨어요?"
 "당연하지. 지금 사람 많은 거 안 보여? 너 늦으면 사장님한테 이르려고 시계도 같이 보고 있었어. 그나마 안 늦은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구."
 "알겠어요. 지금 일 한다구요."

 옷을 갈아입으려 뒤로 뛰어가는 하진의 뒷모습을 보며 서인은 살짝 미소지었다. 어제 언니의 말이 갑자기 귓가를 스쳤다. 

"사랑은 삶의 전부가 아니야. 일부분일 뿐이지."

 그 말을 하던 언니의 표정은 살짝 유쾌하기까지 했다. 서인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고 싶으면 만나. 손을 잡고 싶으면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싶으면 키스를 해. 그럼 되. 단 상대방이 동의한다는 조건 하에서."
 "언니.. 그렇지만...."
 "이솝우화 중에 그런 게 있지. 어떤 여우가 높은 곳에 달린 포도를 먹고 싶은데, 아마 저 포도는 시큼할 거야 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이야기. 지금 내가 볼 때 너는 그래."
 "내가... 포기...한거라구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건 없어. 그렇게 하는 건 너의 선택이야. 그리고 너의 삶은 너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내... 선택...."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하진은 계산하다 말고 멍하니 서있던 서인의 팔을 툭 쳤다. 서인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누님 계산 안하고 뭐하세요?"
 "아. 잠시 딴생각을... 손님 죄송합니다."

 둘은 그 뒤로도 정신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했다. 그날의 점심시간은 참 길었다. 매장이 좀 한가해졌다 싶어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본 서인은 어느덧 자신의 시간이 거의 끝나있는 것을 깨달았다. 유니폼을 벗으러 뒤로 들어가며 서인은 말했다. 

 "하진아."
 "네?"
 "너 오늘 끝나고 뭐해?"
 "저요? 음... 아직 별다른 약속은 없는데요."
 "그래? 그럼 너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올게."
 "저를요?"

 하진은 놀란 토끼눈이 되어 서인을 바라보았다. 서인은 슬쩍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안 잡아먹을테니 걱정마."
 "누님 그게 아니라요."

 하진의 다급한 변명을 듣지도 않은 채 서인은 뒷문으로 들어가버렸다. 하진은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약속이라니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하진의 머리 속은 실뜨기 하다가 실패한 실타래 처럼 잔뜩 꼬여갔다. 서인이 손을 흔들고 나간 후에 하진은 계속 시계로 눈이 가는 걸 막지 못했다. 그날따라 시계 바늘은 발목이라도 잡힌 것 처럼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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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우리는 2010/09/03 11:02 Posted by 피안™

 '벌써 이런 술자리가 몇 번째 였더라?'
 
 갑자기 연희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 물음이었다. 애당초 그에게 빠져들게 된 계기도 술자리였고, 그녀의 마음을 흔들린 것도 술자리에서 그가 내비친 진심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한차례 비우고 나서인지 이렇게 그의 앞에 앉아 있어도, 그가 저렇게 흔들리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저 약간 공허할 뿐 견딜만 했다. 그새 바닥이 보이는 병을 들어 그의 빈 잔에 채우며 그녀는 말했다.

 "더 마실래요? 오빠 너무 빨리 마신 것 같은데 괜찮아요?"
 "..."

성혁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따라준 술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안주는 안 먹어요? 그러다 속 버려요."
 "..."

 연희는 성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온 몸으로 술 밖엔 위로가 될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여기요. 소주 한 병만 더 주세요."

그녀는 손을 들어 술을 더 시켰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안주를 뒤적거렸다. 마음 같아선 그녀도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성혁이 저렇게 안주도 없이 술만 먹어대니 그럴 수가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성혁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잠시 들여다 보던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응. 우리 정연이구나.]
 [술 마셔?]
 [응 나 한잔 하고 있다.]
 [아까 하던 말은 뭐야?]
 [아까? 아하~ 우리 서인이한테 남자 생긴 일?]
 [그게 무슨 소리야? 걔 남자 쳐다보지도 않는 애잖아?]
 [그러게. 근데 있더라구. 난 서인이가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렇게 애틋한 눈빛이라니... 근데 웃기는 건 뭔지 알아? 그놈은 그걸 모른다는 거야. 눈만 봐도 알아야지. 서인이는 말보다는 눈으로 얘기하는 녀석인데 그놈은 그걸 모르더라고.]
 [됐고, 그 남자는 누군데?]
 [나도 몰라. 그냥 편의점에서 같이 알바하는 놈이야.]
 [편의점? 설마 거기 야간 알바?]
 [아니야. 주간 알바 새로 생겼어. 하하하 넌 그런 것도 몰랐냐?]
 [내가 그런 걸 왜 알아야 되? 몰라.]
 [하하 우리 정연이 아직도 많이 까칠하네. 내가 좀 심했나?]
 [됐어. 이제 그런 용건으로 나한테 전화하지마. 알고 싶지도 않고 기분 나쁘니까.]
 [그래. 미안하다. 내가 왜 너한테 전화를 했을까? 후우...]

 전화기를 타고 흐르는 그의 깊은 한숨에 정연은 순간 가슴이 아릿했다. 떨어져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조금씩 잊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리가 없었다.


--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온 서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그늘져 있고 지쳐보였다. 마음이 얼굴로도 이렇게 표현 되는구나 싶었다. 머리를 대충 말린 후 컴퓨터를 켜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고자 노래를 고르고 있는데 밑에 깜박거리는 창이 떴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교회 언니의 메신저 대화창이었다. 그 창을 바라보던 서인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서인아 뭐해?]
 [...]
 [서인이 바빠?]
 [언니.]
 [응 그래. 자리에 있었구나? 대답 없길래 바쁜가 했어.]
 [아... 아니에요. 안 바빠요.]
 [흠? 이상한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언니...]
 
 수도꼭지라도 틀어 놓은 듯 마구 흐르는 눈물에 당황한 서인은 화장실로 달려갔다. 휴지를 뜯어서 다시 책상으로 가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서인아? 너 울어?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메신저로는 안될 것 같아서 걸었어.]
 [언니... 나 힘들어요.]
 [왜? 누가 힘들게 하니?]
 [응... 내가 나를 너무 힘들게 하나봐요.]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길 해봐.]
 [그게요... 흑흑.]

 서인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또 울고 말았다. 평소에는 잘 울지 않는 그녀지만 한 번 울었다 하면 친하던 정연도 못 말릴 정도로 오랜시간 울곤 했다. 꾹꾹 눌러 참아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폭발한 듯 했다. 

 [서인아? 대답해봐.]
 [네.. 흑흑 언니.]
 [언니 지금 너네 집으로 갈테니깐 기다려 알았지?]
 [흑흑. 지금 너무 늦었잖아요. 흑. 괜찮아요 언니.]
 [지금 네가 그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냥 놔둬. 갈게. 30분쯤 걸릴거야. 기다려.]
 [흑흑. 네 언니.]

 --

 언니는 보통 30분 쯤 걸리는 거리를 20분 만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준 서인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언니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인을 꼭 안아주었다. 서인은 어린애 처럼 그 품안에서 엉엉 울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더 나올 눈물도 없는지 소리만 끅끅 내고 있는 서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언니가 말했다

 "서인아. 얼굴 못쓰게 됐다. 가서 좀 씻고 와."
 "... 네."

잠시 후 세수를 한 서인의 얼굴은 한결 편했다. 오랫만에 눈물을 흘리고 나서 그런지 가슴 속에 답답하게 쌓여있던 것들이 씻겨져 나간 기분이었다. 언니는 온화한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이제 하고 싶은 얘기를 해봐."
 "언니..."
 "괜찮아. 우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야.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지만 혼자서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으면 안되는 거야."
 "그게요... 흠...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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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7

소설-우리는 2010/08/31 12:44 Posted by 피안™

 -서인-

 "괜찮아요?"

 그가 내게 물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있는 힘을 겨우 끌어 모아 대답했다.

 "응. 괜찮아."

 그러나 그는 귀신같이 내 눈빛을 읽어냈다.

 "힘들면 기대도 되요."
 
 그 따스한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정말 괜찮아."

 그를 뒤로 하고 앞서 몇 걸음 걸었다. 그의 안타까운 눈빛이 등을 통해 느껴졌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와서 그동안 마음먹었던 그리고 지켜왔던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연애란 그녀에게 사치였다. 하루하루 생활하기도 벅찬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저 낭비라는 생각 밖에 없었다. 물론 여러 사람, 특히 셩혁의 마음은 정말 그녀가 버텨내기 힘들 정도로 그녀에게 의지가 되었지만 그래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정연만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성혁을 옆에 두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하진은...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생각보다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서인은 두려웠다.


-하진-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요."
 "그래. 바래다 줘서 고마워."
 "내일 편의점에서 봐요."
 "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서인의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그녀가 문을 닫고 잠그는 소리가 요란스레 골목을 울렸다. 그 소리가 굳게 닫혀버린 그녀의 마음의 소리 같아 그는 가슴이 아팠다. 

  처음에는 그녀의 환한 미소가 참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녀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지고있는 삶의 무게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도 의지하려 하지 않고 혼자 감내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진은 서인에게 세상은 혼자서 사는게 아니란 걸 알려주고 싶었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기대도 된다고, 그게 자신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벽은 생각보다 두터웠다. 그녀를 만나고 처음으로 포기란 단어를 떠올렸다.



-성혁-

 "나는 그를..."

 한참이나 말을 못하던 서인은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뒤를 하진이 황급히 따라갔다. 성혁은 그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서인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

 사실 그 마음은 굳이 까발리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를 무려 10년 동안 지켜본 자신이 그녀의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마음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전에 자신에게도 적어도 한 번 쯤은 기회가 주어졌을 터였다. 그 녀석이 좀 불쌍하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얘기해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다고 해도 쉽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설사 그녀의 마음에 그 녀석이 담겨 있더라도... 그에게 그녀란 그런 존재였다.


-연희-


 갑자기 전화를 들고 한쪽 복도로 가는 성혁을 연희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통화를 마치고는 뭔가 텅빈 모습으로 벤치에 걸터 앉는 그의 옆에 앉아있던 연희는 그의 머리속에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성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빠."

 그는 자신의 옆에 있지만 그의 정신은 다른 곳에 있는 듯 했다. 연희는 그 텅빈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그를 불러내려 다시 시도했다. 

 "성혁오빠. 오빠!"

 그녀의 톤이 올라간 목소리에 그제서야 성혁은 연희를 돌아보았다. 

 "어?! 어."
 "나가요. 여기 있지 말구."

 멍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그를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어느 새 날은 저물어 밖은 캄캄했다.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볼을 스쳐 가슴 속을 훑었다. 유난히 볼이 차갑게 느껴져 손을 대보니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한 줄기 흘러있었다. 고개를 드니 그의 힘없는 뒷모습이 보였다. 연희는 성혁을 이끌고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성혁을 처음 봤을 때 연희는 자신의 옛모습을 보는 듯 했다. 한 곳만을 바라보고 애타게 기다리다가 상처입은 그 눈빛... 자신은 잘 알고 있으니 치료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잊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상처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깊었다.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그런데 점점 그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곁에 머물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그녀만이 담겨있었다. 바보 같은 짓은 한번으로 족했다. 그녀는 더이상의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성혁에겐 자신에게 줄 만한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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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6

소설-우리는 2010/08/31 12:38 Posted by 피안™
 호수를 통과한 서늘한 바람이 한줄기 불어와 그녀의 머릿결을 흩날렸다. 한 발짝 뒤에서 그녀를 조용히 따라가고 있던 현식의 입에는 살며시 미소가 걸렸다. 같이 걷는 것 보다 뒤에서 걷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곧 정연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고 현식은 자신의 즐거움을 잠시 포기한 채 정연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녀와 가까워 질 수록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은 이미 통제를 벗어난지 오래였다.

 [I sing you sing ~ ♬]

 갑자기 정적을 깨고 울려대는 벨소리에 놀란 정연은 황급히 자신의 가방을 뒤적였다. 발신번호를 본 정연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진 채 현식을 바라보았다. 현식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정연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나야.]
 [네가 왠일이야?]
 [목소리 꽤나 차갑다. 하긴 전혀 반갑지는 않겠지]
 [나 지금 밖이야.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너한테 할 말이 아닌 건 알지만 너 밖에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걸었다.]
 [뭔데?]
 [서인이... 남자가 생겼어.]
 [...]
 [들었어?]
 [어. 근데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듣고 싶지도 않고 들을 필요도 없어.]
 [그냥 너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아서.]
 [... 끊어. 나중에 전화할게.]
 [그래. 알았다.]

 전화를 끊고 난 정연의 얼굴엔 그녀의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는 조용히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식은 너무 궁금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접어둔 채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몇걸음 이나 걸었을까? 정연은 뒤를 돌아보며 현식에게 말했다.

 [현식씨 미안한데요...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어요.]
 [그래요. 제가 오늘 정연씨에게 보여드리고, 하고 싶었던 것은 모두 했으니 이제 가요.]
 [미안해요. 그래도 좀 더 같이 있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전 정연씨에게 편한 존재가 되고 싶어요. 그러니 부담스러워하거나 미안해 하지 마세요.]
 [네. 고마워요.]

  데려다 준다는 현식을 겨우 만류한 채 버스에 오른 정연은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머리속은 전화를 걸어온 성혁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서인에게 남자가 생겼다니 그건 정말 상상 못했던 상황이었다. 정연이 꽤 오랫동안 그녀의 절친한 친구로 지내왔지만 서인이 남자에게 마음을 주는 건 본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성혁은 더 서인을 포기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버스에서 내린 정연은 전화기를 들고 멈춰섰다. 화면에는 성혁의 이름이 떠있었지만 정연의 손가락은 쉽사리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주위를 배회했다. 그러다가 입술을 꽉 문 정연은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귀에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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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소설-우리는 2010/08/24 13:42 Posted by 피안™

걷는 건 뭐가 그리 급한지
좀 둘러보고 걸어도 될텐데
고개는 숙이고
발끝을 바라보며
잰 걸음을 놀려댄다.
그렇게 서둘러 도착해도
겨우 1~2분 차이 뿐 인것을

이제서야 만났다고
전에는 다 연습이었을 뿐이라고
영원히 같이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또 연습이 되어버린다
이젠 시작도 전에 이것도 연습이 아닐까
괜히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믿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그래... 다 똑같은 거야 라고 생각한다

쉬엄쉬엄
그래도 갈 수 있고
그래도 만날 수 있고

쉬엄쉬엄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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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5

소설-우리는 2010/05/27 11:03 Posted by 피안™

 연희와 함께 공연장에 들어온 성혁은 갑자기 목이 말랐다. 슬쩍 복도를 살펴보니 한쪽에 정수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연희와 함께 그쪽으로 다가가는데 물을 마시고 있는 한 커플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 그들의 뒷모습이 매우 익숙했다. 그리고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본듯한 묘한 기시감이 온몸을 감싸왔다. 그 때 앞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박성혁? 네가 여긴 왠일이야?"
 "서인이 넌 왜 여기있어? 너 잠깐 이리와봐. 나랑 얘기 좀 하자."
 
 서인의 손목을 우왁스럽게 붙잡은 성혁이 막 움직이려는 데 하진이 그를 막아섰다.
 
 "얘기는 저랑 하시죠. 서인씨는 놔두구요."
 "내가 왜 당신이랑 얘기를 해야 하지? 너 따위에겐 할 말 없어."
 "전 있거든요. 그리고 이건 좀 놓고 말씀하시죠."

 힘을 주어 서인의 손목을 성혁의 손에서 풀어낸 하진은 서인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러자 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혁이 따라나서려고 하자 하진은 몸으로 제지하며 말했다.

 "같이 온 아가씨도 좀 생각하시죠. 그 분 보내고 둘이 얘기합시다."
 
 그제서야 연희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성혁은 돌아보았다. 연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연희야. 먼저 들어가 있어. 나 이녀석이랑 얘기하고 들어갈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인이 사라진 곳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옥상으로 향했다.

  "네가 뭔데 우리 일에 참견이야?"

 먼저 날선 소리를 내는 성혁을 잠시 쳐다 본 하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랑 서인씨는 별 관계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뭐? 이자식이 정말."

 성혁의 주먹이 빠르게 하진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나 하진은 고개를 살짝 비틀어 피한 뒤 성혁의 명치에 자신의 주먹을 꽂았다.
 
 "헉"

 성혁은 숨이 막히는지 한 동안 상체를 숙인 채 일어나지 못했다. 하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간신히 고개를 든 성혁은 하진의 눈빛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동정하지마. 개새끼야."
 
 마구 달려드는 셩헉의 몸부림에 하진은 바닥에 뒹굴었다. 주먹이 오고가고 둘의 얼굴이 엉망이 되어갈 무렵 서인과 연희가 그들을 발견하고 급히 둘을 떼어놓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주먹질을 하고 그래?"
 "오빠 괜찮아요?"
 "이거 놔."

 부축하는 연희를 뿌리치고 하진에게 달려드는 성혁의 앞을 서인이 막아섰다.

 "이제 그만해. 더이상 추해지지마." 
 "서.. 서인아. 너 그 자식이 나보다 좋은거야? 그래?"
 "유치한 비교하지마. 지금 넌 사람도 아니야. 집착에 미친 동물이지."
 "뭐가 어째?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그게 내 탓이라고 말하지마. 네가 날 좋아한 것도 그리고 나에게 집착하는 것도 모두 네가 결정한거지. 내가 시킨 게 아니야."
 "그거 하나만 말해봐. 저녀석이 좋아? 남자로 좋은거냐구? 사랑이라도 해?"
 "뭐?"
 "그런 거라면 내가 깨끗이 포기해줄게. 나 말고 저 놈을 사랑하냐고?"
 
 서인은 몹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거봐. 넌 대답 못하지? 넌 항상 그랬어. 나처럼 저녀석 한테도 상처만 주고 끝낼거야. 희망만 잔뜩 주고 고문할 거라고."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뭐가 아니야?"
 "난... 난..."

 서인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거친 말을 내뱉으며 상처입은 야수의 표정을 한 성혁과 그를 부축한 연희... 그리고 뒤에서 그녀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하진도 모두 그녀의 입을 바라 보았다.

 "난...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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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4

소설-우리는 2010/05/27 10:46 Posted by 피안™
 둘은 버스에 올랐다. 현식이 운동을 가려는 장소가 조금 멀다고 버스를 타자고 권했기 때문이었다. 버스에는 마침 맨 뒷자리가 모두 비어있었다. 정연과 나란히 자리에 앉은 현식은 피식 하고 웃었다.

 

 현식씨 왜 웃으세요?”

 좋아서요.”

 뭐가요?”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하나 둘씩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

 가끔 버스에 타면 그때마다 다정하게 같이 앉아서 가는 커플들이 많더라고요. 그게 얼마나 부럽던지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좋아요.”

 현식씨는 참 낙천적인 분 같아요.”

 그런가요? 그럼 성공이네요.”

 ?”

 지금 엄청 노력하는 중이거든요. 그런 모습으로 보이려고요.”

 후후 그래요 아주 잘 보이네요.”

 . 정연씨 지금 농담하신 건 아니죠?”

 으음몰라요.”

 하하 정연씨 은근 귀여운 면이 있으시군요.”

 

 얼굴이 붉어진 정연은 잠시 현식을 외면한 채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현식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사랑스럽고 또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이런 시간이 다시 올지 모르기에 그는 시간이 더디게 가기만을 바랬다.  

 버스를 타고 현식과 정연이 도착한 곳은 한적한 호수였다. 도심에 있는 호수 치고는 규모가 상당히큰 편이었다. 호수를 따라서 산책로를 아담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특이하게 포장된 길이 아닌 흙으로 된 길이었다. 현식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정연을 호수가로 안내했다.

 

 여기에요. 우리의 오늘 운동코스.”

 아 그래요? 도심에 이런 호수가 있다니 좀 의외네요.”

 그렇죠? 저도 그래서 종종 찾아오곤 해요. 여기는 그래도 몸과 마음이 좀 개운해 지는 느낌이랄까요? 그 기분을 정연씨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럼 이제 운동 시작해 볼까요?"
 



--

 "누님. 오늘 저녁에 뭐하십니까?"
 "나? 오늘 저녁에 별 일 없는데."

 "그렇죠? 그럼 누님 오늘 저녁시간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왜? 무슨 일 있어?"

 "그거야 가보시면 압니다."

 "흠... 그래 알았어."

 

 난데없는 하진의 제안에 서인은 얼떨결에 수락을 하고 말았다. 하진과 있으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서인이 뭔가 생각하거나 할 여유를 주지 않고 밀어붙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런 상황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낯설었다. 자신과는 너무 다른 사람. 그래서 그에게 더 끌리는 지도 몰랐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간 서인은 하진과의 약속때문에 마음이 분주했다. 어디로 가는지 뭘 하러 가는지도 말을 안 해준 탓에 어떻게 옷을 입고 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옅게 화장을 한 뒤 옷장을 연 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 그다지 옷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막상 뭔가 입으려니 모두 티셔츠나 청바지 뿐이었다. 그나마 제일 나은 거라고 생각한 것을 꺼내 입고는 거울에 비춰보는데 하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님 뭐하세요? 나오셨어요?]
 [아니. 아직 시간 좀 남았잖아?]
 [전 이미 대기 중 이거든요.]
 [아 그래? 알았어 곧 나갈게.]

 그렇게 하진의 손에 이끌리어 간 곳은 소극장과 각종 야외공연장들이 즐비한 대학로였다. 하진은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며 처음 와본 티가 역력한 서인을 보고 미소지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그녀는 이런 문화를 즐겨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하진의 지갑 속에는 얼마 전 화제에 올랐던 뮤지컬 티켓 두장이 있었다. 하진은 서인에게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너무 삶의 무게에 눌려있었고, 하진은 그런 그녀가 항상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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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3

소설-우리는 2010/05/08 11:39 Posted by 피안™

현식은 약속장소에서 정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5분 지났을까 골목을 돌아나오는 정연의 모습이 보였다. 현식은 손을 흔들며 정연을 반겼다

 "
정연씨 어서오세요
."
 "
제가 좀 늦었죠? 차가 약간 밀리더라구요
."
 "
늦기는요. 여성분이 5분 정도야 에티켓이죠. 일단 우리 점심시간 이니까 밥먹으러 갈까요? 혹시 정연씨 매운 거 잘 드세요
?"
 "
매운 거요? 저 매운 음식 좋아해요
."
 "
제가 요 근처에 매운데 정말 맛있는 해물 짬뽕집 알거든요. 어때요? 한 번 먹어볼래요
?"
 "
그래요. 좋아요
."

 가게는 간판도 없는 허름한 건물에 1층에 있었다. 하지만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상당히 아늑하고 깔끔했다. 주문은 현식에게 맡기고 정연은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가게의 한 쪽벽에는 온통 다녀간 사람들의 메모장이 즐비했다. 정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것을 보자 현식은 갑자기 일어나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있는 메모장 더미를 파헤치더니 그중 하나를 떼어왔다. 놀란 정연은 혁식을 만류하며 말했다.
 
 "
현식씨 남의 것을 막 떼어오면 어떡해요
?"
 "
남의 것이 아니니까 괜찮아요. 제가 저번에 왔을 때 붙여 놓은 거거든요
."
 "
아 그래요
?"
 "
. 저는 미래를 예언한다구요. 한번 보실래요?"

 그가 떼어온 메모지를 읽은 정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에 올 때는 꼭 커플이 되어 오겠습니다. 하느님 부처님 삼신할머니 꼭!!!]

 "
이게 예언이라구요
?"
 "
그럼요. 이렇게 정연씨와 같이 왔잖아요
."
 "
... 그렇지만 커플은 아닌데
..."
 "
에이.. 원래 유명한 예언들도 다 짜맞추기 나름이더라구요. 이 정도면 훌륭한거에요
."
 
 
정연이 약간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있을 때 마침 분위기를 바꿔주려는 듯 음식이 나왔다. 현식이 주문한 것은 해물 짬뽕 두 그릇이었다. 빨갛고 얼큰해 보이는 국물에 수북이 올려져 있는 각종 해산물이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정연은 매운 음식도 좋아하지만 특히 해산물을 매우 좋아했다.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일단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모금 떠 먹었다
.

 "
. 현식씨 이거 정말 맛있네요. 먹어 본 짬뽕 중에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
 "
첫맛은 정말 끝내주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마 입안이 얼얼해 질거에요. 조심하세요 정연씨
."
 "
. 괜찮아요. 전 매운 거 잘 먹는다구요
."
 "
아마 그 말씀 후회하실 겁니다
."
 
 
둘은 한동안 침묵한 채 열심히 짬뽕을 먹었다. 바깥은 약간 추운 듯 한 날씨였지만 짬뽕의 열기 때문인지 몸은 훈훈했다. 한참 먹고 있는데 열중하던 정연이 고개를 들더니 현식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지었다
.

 "
정연씨 왜 웃어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
 "
. 그런건 아닌데요. 너무 맛있게 드셔서요. 얼굴이 사우나에서 막 나온 사람 같아요
."
 "
그래요? 이게 좀 매워야 말이죠. 근데 정연씨는 안 매워요
?"
 "
.... 맛있기만 한대요? 그리고 저는 땀이 잘 안나는 체질이거든요
."
 "
그래요? 오호... 좋아요 이따가도 땀이 안나는지 한번 볼게요
."
 "
이따가요
?"
 "
. 맛있는 음식 먹었으니 그 다음은 운동 타임이죠
."
 
 
말을 마친 현식은 다시 열심히 짬뽕을 먹기 시작했다. 맵다고 하더니 결국 국물까지 싹싹 비우고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정연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


--

 

성혁은 휴대 전화를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액정에는 연희의 번호가 띄워져 있었다. 통화 버튼만 누르면 연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성혁은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누르지 못했다. 결국 전화를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곧 그의 방에는 담배 연기가 부옇게 차 올랐다. 더 이상 피웠다가는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들짝 놀란 그는 서둘러 담배를 끈 뒤 잠시 액정을 노려보았다.

 [
여보세요.]

 [오빠 나에요. 왜 그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요?]

 [.. 진동이라서 늦게 봤어.]

 [그랬구나. 오빠 오늘 뭐해요?]

 [딱히 뭐 할 게 있는 건 아닌데. ?]

 [잘됐다. 오빠 나랑 뮤지컬 보러 가요.]

 [? 뮤지컬?]

 [. 아는 언니가 표를 2장 줬거든요. 같이 갈거죠?]

 [그래. 알았어. 언제?]

 [이따 4시에 오빠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봐요.]

 [알았어.]

 

 날아갈 듯이 가볍고 기분 좋은 목소리의 연희였다. 성혁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몰아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연희가 제일 이상했다. 자신은 그토록 고민하며 그녀에게 연락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잡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매우 가벼운 여자로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혼란한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됐든 그는 약속에 동의했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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