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님 저기 골목 돌아서 바로요. 내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혼자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
"네. 괜찮아요."
"남자친구 때문에 아가씨가 고생이 많네요."
"네? 아... 네..."
남자친구라는 택시기사의 말에 화들짝 놀란 연희는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성혁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이 절 그렇게 봐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곧 택시에서 내린 연희는 성혁을 부축하며 그의 집으로 갔다. 내리면서 깨운 탓인지 귀소본능인건지 성혁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집쪽으로 발을 내딛기는 했다. 하지만 인사불성이 된 남자를 끌고가는 것은 생각보다 꽤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연희는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손으로 닦으며 성혁에게 말했다.
"오빠 다 왔어요. 정신 좀 차려봐요. 방 열쇠 어딨어요?"
"으음..."
성혁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손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잠시 궁리하던 연희는 할 수 없이 성혁을 대문 옆 벽에 기대어 놓고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혁의 두 팔이 그녀를 감싸안았다.
"서인아..."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란 연희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그렇게 술에 취해서도 찾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연희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고였다.
"서인아... 가지마."
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가슴을 찢어 놓았지만 그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연희는 잠시 그대로 있고 싶다는 충동에 빠졌지만 곧 성혁을 이렇게 오래 밖에 세워둘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그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뒤 그의 착각을 이용해 일단 그를 방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성혁아. 여기 밖이야.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응. 알았어."
성혁은 그녀를 정말 서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연희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연희는 방문을 열고 침대 위에 그를 눕혔다. 그리고 그의 가방을 방 한쪽 구석에 내려 놓은 뒤 잠시 의자에 걸터 앉았다.
"휴..."
전신이 노곤해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자는 건 둘째치고 그를 끌고 오느라 땀으로 범벅이 되어 몸이 너무 끈적거렸다. 그의 방에서 씻을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역시 안된다고 생각한 연희는 누워있는 성혁 옆에 잠시 앉았다. 그가 깰까봐 눈으로만 살짝 인사하고 가방을 찾아 방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인아... 가는거야?"
문을 열려던 연희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하고 있었다. 잠꼬대 이려니 싶은 생각에 다시 나가려던 연희의 뒤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가지말라니까. 넌 그 녀석이 그렇게 좋니? 나는 안되겠니? 10년 동안 내가 들인 공으로는 부족하니? 그럼 10년 더 기다릴게. 그래도 안되?"
연희는 너무나 또렷한 그의 목소리에 그가 지금 깨어있나 싶어 그의 곁으로 다시 다가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눈을 감은 채 약간 몽롱한 표정이었다. 연희는 다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정연이 일은 사과할게. 미안해. 그날 정연이 집에서 날 본 거... 나 그 때 정말 절박했어. 나만 바라봐주는 여자를 나도 좋아해보자 라고 생각했어. 근데 네가 찾아왔잖아. 그래서 난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어. 그저 옆에만 있으려고도 했어. 근데... 다른 남자라니.. 그건... 견디기가 힘들더라. 변한 네 눈빛이 나를 미치게 했어. 그 눈빛... 나는 10년을 기다려도 받아본 적 없는데 그 녀석은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 너 진짜 나한테 너무한 거야. 정말 너무한거라구."
그의 쏟아지는 독백에 연희의 얼굴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신이 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되나 싶은 생각에 뿌리치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의 손은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고 있었다.
"그래. 억지라는 거 알아. 그리고 마음이 내 맘대로 되는게 아니란 것도 알아. 네 마음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네 마음이 변하지 않았듯이 내 마음도 쉽게 변하진 않을거야. 미안하다. 내 마음은 아직 널 놓을 수가 없어."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연희는 그것을 느꼈지만 한동안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놓을 수가 없다는 그 말이 너무나도 깊게 가슴에 박혔다. 잠시 후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이번엔 성혁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 앞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연희는 곧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누워있던 성혁의 입에서 나직히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연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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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러 가기 귀찮아서 공원으로 바로 왔다. 끝나면 장평공원 중앙에 있는 정자로 와]
서인의 문자를 받은 하진은 순간 당황했다. 자신은 이 동네에 사는게 아니라서 지리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인터넷으로 지도 검색을 해보고는 대략 위치를 파악한 하진은 상훈을 애타게 기다렸다. 마침 상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아 그래? 나 제시간에 온거 아니였어?"
손목 시계를 들여다 보고는 상훈이 정시에 온 게 맞다고 외치려는데 그 새 바람같이 그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하진이 보였다. 상훈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저녀석 왜 저래.. 무슨일 있나?"
공원 정문을 슬며시 내려다 본 서인은 뛰어 들어오는 하진의 모습을 발견했다. 서인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침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서인은 가져온 봉지에서 주섬 주섬 무언가를 꺼내 옆에 늘어놓았다. 마지막 것을 꺼내는 데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진이 그녀의 곁에 도착했다.
"아 힘들어. 누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 이 동네 사람도 아닌데 여기 찾느라고 엄청 해맸잖아요."
"잘 찾아온 거 다 알아. 그리고 이 동네 공원은 여기 하나밖에 없거든? 왔으면 앉아."
"헉헉. 뭐 시원한 것 좀 없어요?"
"자 여기."
시원한 맥주캔을 건네는 서인의 모습에 하진은 빙그레 웃음지었다. 서인은 그것을 건네며 하늘에 손짓을 했다. 하진은 그 손짓에 따라 눈을 돌렸다. 맞은 편 산위에는 해가 반쯤 몸을 가리고 있었다. 산 봉우리 주변 하늘은 보기만 해도 따뜻해 보이는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진은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잠시 잊은 채 하늘을 감상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짝 본 서인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로써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노을을 보여준 두 번째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