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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9

소설-우리는 2010/09/17 00:07 Posted by 피안™

 그녀는 어떤 남자와 둘이 있었다. 그 남자는 상의를 입지 않은 채 그녀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등만 보아도 그녀의 가슴이 살짝 아려왔다. 그녀의 손이 그의 등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덜컹]

 문이 열렸다. 열린 틈으로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 사람을 본 그녀는 입이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뿐만 아니라 몸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을 연 그 사람은 안을 슬쩍 둘러보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닫고 나가려 했다. 그러자 그녀에겐 뒷모습을 보이던 그 남자가 그 사람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강서인!"

 [부우우웅-]

 정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성혁과의 통화를 끝내고 생각에 잠긴다는 게 어느새 침대에서 잠이 들어 있었던 듯 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방금 꾼 꿈을 떠올렸다. 좀 더 꿈에 대해 생각하려는데 문득 어떤 소리를 듣고 자신이 일어났다는 게 떠올랐다. 화장대 위에 놓인 휴대전화의 액정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것을 들고 확인했다.

 [정연씨~ 좋은 밤 되세요. 복잡한 것들은 잠시 내려 놓으시고 푹 쉬세요.]

 정연은 문자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현식과 데이트를 했다는 기억이 났다. 성혁과 서인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해서 정작 오늘 만난 현식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시간을 확인한 정연은 전화를 들고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며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전화를 그냥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뭔가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뭐라고 써야 할지 너무 난감했다. 정연은 나직한 한숨을 토하며 다시 몸을 눕혔다.  


--

 편의점 근처에 도착한 하진은 슬쩍 편의점 안을 쳐다보았다. 손님은 평소처럼 많은 상태였고 서인은 계산해주랴 말 상대 해주랴 정신이 없어보였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안심한 하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서인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왔으면 빨리 들어올 것이지 망은 왜 봐?"
 "헉. 누님 보셨어요?"
 "당연하지. 지금 사람 많은 거 안 보여? 너 늦으면 사장님한테 이르려고 시계도 같이 보고 있었어. 그나마 안 늦은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구."
 "알겠어요. 지금 일 한다구요."

 옷을 갈아입으려 뒤로 뛰어가는 하진의 뒷모습을 보며 서인은 살짝 미소지었다. 어제 언니의 말이 갑자기 귓가를 스쳤다. 

"사랑은 삶의 전부가 아니야. 일부분일 뿐이지."

 그 말을 하던 언니의 표정은 살짝 유쾌하기까지 했다. 서인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고 싶으면 만나. 손을 잡고 싶으면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싶으면 키스를 해. 그럼 되. 단 상대방이 동의한다는 조건 하에서."
 "언니.. 그렇지만...."
 "이솝우화 중에 그런 게 있지. 어떤 여우가 높은 곳에 달린 포도를 먹고 싶은데, 아마 저 포도는 시큼할 거야 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이야기. 지금 내가 볼 때 너는 그래."
 "내가... 포기...한거라구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건 없어. 그렇게 하는 건 너의 선택이야. 그리고 너의 삶은 너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내... 선택...."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하진은 계산하다 말고 멍하니 서있던 서인의 팔을 툭 쳤다. 서인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누님 계산 안하고 뭐하세요?"
 "아. 잠시 딴생각을... 손님 죄송합니다."

 둘은 그 뒤로도 정신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했다. 그날의 점심시간은 참 길었다. 매장이 좀 한가해졌다 싶어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본 서인은 어느덧 자신의 시간이 거의 끝나있는 것을 깨달았다. 유니폼을 벗으러 뒤로 들어가며 서인은 말했다. 

 "하진아."
 "네?"
 "너 오늘 끝나고 뭐해?"
 "저요? 음... 아직 별다른 약속은 없는데요."
 "그래? 그럼 너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올게."
 "저를요?"

 하진은 놀란 토끼눈이 되어 서인을 바라보았다. 서인은 슬쩍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안 잡아먹을테니 걱정마."
 "누님 그게 아니라요."

 하진의 다급한 변명을 듣지도 않은 채 서인은 뒷문으로 들어가버렸다. 하진은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약속이라니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하진의 머리 속은 실뜨기 하다가 실패한 실타래 처럼 잔뜩 꼬여갔다. 서인이 손을 흔들고 나간 후에 하진은 계속 시계로 눈이 가는 걸 막지 못했다. 그날따라 시계 바늘은 발목이라도 잡힌 것 처럼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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