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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사람에게 말을 한다는 것, 들어준다는 것


얼마 전 오랫만에 대학 친구를 만났습니다.

대학 때는 같은 과라서 수업도 같이 듣고 밥도 같이 먹으며 붙어다녔는데

졸업을 하고 나서는 서로 대학원이다 회사다 하며 너무 바빠서

일년에 한 두번 얼굴 보기도 참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그 친구 얼마 전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이 녀석이 근처에 왔다갔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회사는 지방이라서 전 당연히 지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시댁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시댁이 근처더군요.

그래서 바로 의기투합. 지방에서 올라오는 금요일 저녁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에 그 친구는 항상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참 좋아하고 잘하기도 했고 운동도 잘하고

항상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을 한동안 부러워 한적도 있었습니다.

만나서 전 그 친구에게 한마디를 건냈습니다.

 

"잘 지내?"

 

이 한마디에 친구는 봇물터진 듯 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친구의 개인적 사정이므로 자세히 밝히지는 못하지만 그 가정사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힘에 겨웠습니다.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집안의 대소사며 모든 문제를 혼자 처리하다 시피 했더군요. (참고로 그 친구는 큰딸도 아닙니다. 언니와 남동생이 있지요.)

 

물론 학교 다닐 때에도 잠깐씩 그런 얘기를 듣긴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친구가 심각한 스타일이 아니라서 웃으며 몇마디 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저 견딜만 한가보다. 그렇게 큰일이 아닌가보다 하고 저 혼자 지레짐작 했을 뿐이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그 상황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더군요.

 

친구는... 사는게 너무 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힘들다고

그 친구의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참 독실한 사람이죠. 저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ㅎㅎ

참고로 기독교에선 자살은 큰 죄입니다.

그런 친구가 한동안 아니 지금도 가끔 어떻게 죽어야 할까 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죽지 못할 거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냥 놓아버리고 싶은 적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울먹이는 그녀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것 밖에 없더군요.

 

처음에는 그 힘겨움이 묻어나오던 눈이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편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 친구 성격상 오래 심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그렇게 하면서도 피식 거리며 웃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이제 그 웃음 너머에 있는 고통이 보였습니다.

그저 듣기만 하면서도요.

 

그제서야 친구가 좀 급하게 보자고 한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친구는 필요했던 겁니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전 아무것도 그녀에게 해줄 수 없고 그저 들어줄 뿐이었지만

그녀에겐 그게 위로가 되었나봅니다.

좀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돌아가더군요.

 

그저 2시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준 시간.

 

저에겐 그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제 친구를 그래도 조금은 삶으로 끌어온 것 같아서

늦었다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친구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좀 아팠습니다.

 

한때는 주변 사람들이 일만 생기면 절 찾아 이야기하는 통에

들어주는 게 지겹다 힘들다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런 상대가 되어줄 수 있음을 감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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